2022년 8월 3일 수요일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Ⅱ≫ 16장 무아와 윤회의 주체에 대한 실체적인 진실 -영체를 알지 못한 데서, 무아를 잘못 해석..

 16장

무아와 윤회의 주체에 대한 실체적인 진실

-영체를 알지 못한 데서, 무아를 잘못 해석하여 모순 야기

 

중생이 육도에

윤회 전생하는 데 있어서

그 주체는 1, 2, 3번의 영혼체인 것입니다.

이것은 힌두교의 아트만과는 다릅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영산불교에서는 인간의 실체는 영체1번이고 이 영체1, 2, 3번가 윤회의 주체가 되어 윤회 전생을 되풀이 한다는 영체윤회설을 주장하였습니다. 물론 이 경우의 영체는 업덩어리가 붙어 있는 청정하지 못한 영체입니다. 청정한 순수 영체라면 당연히 해탈 세계로 가는 주체가 됩니다.


이제 나는 무아와 윤회 주체간의 모순에 대하여 고민하고 있는 우리 불교계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지적해드립니다.


한 마디로 인간 영혼체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것에서, 무아를 잘 못 해석하여 이러한 모순을 스스로 야기시켜 놓고 그 모순을 없애려고 온갖 이론을 다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 현재 우리 불교 교학의 실정입니다.

 

본고本考 무아와 윤회의 주체에 대한 학계의 오랜 논쟁에 대하여 여기 현지사에서 불교 논리로 파헤쳐 답한 것입니다. 육도를 윤회하는 인간 영혼체, 적멸의 세계 쪽으로 들어가는 청정한 영혼체를 보는 보살, 붓다의 경계에서는 물론 너무나 상식적인 명제인 것입니다.

 

무아無我는 ‘비본질적인 나’라는 의식, 그것을 부정하는 것

 

여기서 무아를 두 가지 경우로 구분하여 설명합니다. 첫째는 육체에 대한 것으로서 현상계의 모든 것은 고유한 실체가 없다는 의미에서 육체곧, 나도 색·수·상·행·식이라는 오온五蘊의 인연으로 조합된 허망한 것이므로 실체가 없는 ‘무아’라고 보는 것입니다. 물론 영기서 육체 자체가 없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둘째는 영체에 대한 것으로서 여기서 무아의 의미는 내가 수억겁을 윤회 전생하면서 “비본질적인 것들이 영체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상태의 ‘그 나’”를 부정한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활동 주체이며 실체인 영체까지도 없다고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비본질적인 것들이란 업장, 탐진치 삼독, 108번뇌, 습, 기와 그 찌꺼기영체 뱃속에 있는 업신 따위도 포함들 모두를 말합니다.

 

‘그런 나는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면 무아無我의 개념이 되고, ‘그것은 ‘참된 나’가 아니다’고 보면 비아非我의 개념이 됩니다. 무아가 불교 용어로 굳어지긴 했으나 일반적으로 비아非我의 개념이 혼돈을 피하면서 이해하기엔 편한 용어라고 생각합니다.

비아非我라고 할 경우에는 또 다른 나의 실체가 전제되어 있는 개념입니다. 그것이 바로 나의 실체인 무구 청정한 영체입니다.

 

무아는 현상계의 모든 존재는 실체가 없다는 가르침_사례

 

이 무아개념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 시켜드리기 위해 현지사에 보신불로 현신하셔서 보여주신 부처님의 가르침을 소개해드립니다. 영ㅅ나 당시 ‘염화시중의 미소’이야기는 부처님께서 불교 핵심 교리의 하나인 무아사상을 가르쳐 주기 위한 방편으로 꽃을 들어 보이신 것입니다.

 

이것은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 나오는 현대판 ‘영산회상 거염화염화시중의 미소’이야기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최근 대적정삼매에서 부처님과 가섭존자광명 만덕 큰스님께서 직접 대화한 내용을 여기 소개합니다. 영산 당시에 부처님은 육신을 가진 부처님應化身佛이셨는데 지금은 빛의 인격체인 보신불로 현신하셨고, 가섭존자는 당시에는 상수보살이었으나 지금은 불과 이루신 신분으로 하신 대화입니다.

 

어느 날 세존께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로 뜨셔서 한마당 작업하시고 원만보신으로 현신하셨습니다. 깨끗하고 탐스러운 꽃 한 송이수국화를 드시고서, “이게 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물론 깊은 선정 속의 일입니다.

광명 만덕 큰스님가섭존자

“본래부터 없는 것, 이름하여 꽃이라 합니다.”

하고 대답하시니, 다시 물으셨습니다.

“이 꽃의 실체가 있느냐.”

“없사옵니다.”

“영산 당시의 이 일은 있다 없다를 초월한 자리를 가르치고자 함이다. 살아 숨 쉬는 모두는 이 꽃과 같이 허망하여 실체가 없으니 믿을 것이 없다는 무아사상을 가르침이니라.”

 

진실은 이러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있다 없다를 초월한 자리’는 시공을 초월한 세계본체계를 말씀하신 것이고 ‘실체가 없다’는 말씀은 현상계를 두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영산 당시 가섭존자는 대보살로서 부처님께서 들고 계신 극락세계의 꽃인 금색 바라화를 볼 수 있었고 그 의미도 간파할 수 있어 홀로 미소를 지어 세존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었습니다.

 

현상계의 실체 없음을 본체계까지 연장하면 잘못

 

현상계의 우주 만물에 일체 실체가 없다는 말은 맞지만 이를 본체계까지 연장하면 잘못된 것입니다.


나에게서 비본질적인 것들을 다 제거하고 난 다음의 ‘나’는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말씀드립니다. 그 존재가 바로 순수한 1·2·3번 영체, 그 중에서도 나의 실체, 인간의 본체인 청정한 1번 영체입니다.


그 영체의 청정한 순도에 따라 아라한이 되고 보살이 되고 붓다가 되는 것입니다. 붓다는 4개의 영체가 청정을 넘고 발광發光을 넘어 빛덩어리 자체가 됩니다. 이 순수한 영체는 본체계의 영역입니다. 그러나 비본질적인 것들이 붙어있는 영체는 현상계의 존재로 보는 것입니다.

 

이제 무아를 설명함에 있어 현상계의 육신과 비본질적인 것들이 붙어있는 영체로 한정해야지 이를 순수한 영체의 본체계까지 확대하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윤회의 주체로서의 영체와 아트만Atman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사라지지만 영혼체영체는 육체를 빠져나와 새로운 삶을 계속합니다. 중생의 영체는 다음 생에 지옥을 가거나 사람이나 짐승 몸을 받아오는 등 육도 윤회의 주체가 됩니다.


물론 청정한 성자의 영체는 해탈세계로 가는 주체가 됩니다. 그러나 현재의 불교에서는 이러한 영혼을 윤회 주체로서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실제로는 영혼을 천도시키는 천도재를 많은 절에서 지내고 있는 등 이론과 실제가 모순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오히려 힌두교와 자이나교에서는 영혼과 같은 존재인 아트만Atman_자아이나 지와Jiva_생명 원리가 윤회를 하는 주체라고 봅니다.자이나교의 지와Jiva는 영혼에 업이 부착된 일종의 신체 업신으로서 이 업신이 생을 이어간다고 보고 있어 영산불교의 영체윤회설과 유사한 면이 있다 하겠습니다.


인도의 우파니샤드나 베단타학파에서는 이 아트만을 보편적 실재實在로 보아 브라흐마, 즉 우주적 본성과 같은 성격으로 보고 있습니다.

 

영산불교에서 말하는 영체는 우주의 본성과는 다른 개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힌두교의 아트만은 인간의 실체와 우주 본성을 혼동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영산불교에서 말하는 영체와 아트만Atman과는 구별됩니다.

 

현재 불교 교학의 ‘무아와 윤회의 주체’에 대한 몇 가지 논점에 대하여

 

현재 불교 교학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무아와 윤회의 주체’에 대한 몇 가지 논점에 대하여 나의 견해를 밝힙니다.

 

첫째, ‘무아를 주장하는 불교에서는 윤회의 주체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하는 데 대하여는 이미 설명드린 대로 무아를 잘못 해석한데 기인한 것으로 무아와 윤회 주체간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들 간에 모순이 있다고 전제하고 윤회의 주체 대신 업이나 아뢰야식을 내세운 이론은 재검토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 ‘업에 의한 무아 윤회’와 관련하여 견해를 말씀드립니다. 이 이론은 한 존재가 살아있을 때 업력이 잠재적인 에너지, 즉 업력 상태로 축적되어 있다가 죽으면 그 업력이 작용해서 다음 존재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업력이 잠재적인 에너지로서 윤회의 원인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내가 지은 업은 반드시 내가 받는 것이 인과응보의 우주 이법이며 윤회와 업사상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업을 지은 주체영체가 과보를 받아야지 어떻게 윤회의 원인이 되는 ‘업’ 자체가 도리어 과보를 받는단 말입니까? 이것은 본말이 전도된 이해할 수 없는 이론입니다.

 

셋째, 유식학에서는 아뢰야식을 윤회의 주체로 보고 있습니다. 이 이론은 식이란 것이 찰나찰나 변하는 것이라는 측면에서는 무아無我윤회적 입장이지만, 아뢰야식의 경우 종자를 가진 연속적인 식의 흐름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일면 유아有我윤회적인 성격도 있다고 보겠습니다. 그러나 식은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어떤 주체가 있어야 의미가 있으며, 식 그 자체만으로 의미 있는 주체가 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아뢰야식은 장식藏識이라고도 하며 업의 저장고와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저장고를 만들어 가지고 있는 주체가 윤회를 해야지 그 저장고 자체가 윤회한다는 개념은 맞지가 않습니다. 인과응보의 관점에서는 주체를 떠난 아뢰야식이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유식학에서는 아뢰야식을 선·악·중립의 씨앗을 모두 가진 중성적 존재로 보고 있는데 그 중성적 존재 자체가 지옥에 가서 벌 받고 하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다시 말하면 식 자체가 인과응보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식의 주체를 영체로 보아 이 영체가 윤회를 하는 것입니다.

 

넷째, 윤회를 하면서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영혼과 같은 어떤 것이 반드시 옮겨가야 할 이유가 없다. 존재 자체가 변화하면서 계속 윤회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업력業力이라고 합니다.


여기서의 가장 큰 문제 또한 윤회 주체가 없이 어떻게 ‘내가 지은 업을 내가 받는다.’는 인과응보의 우주 이법을 만족시킬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변화해 가는 전후의 존재 간에 동일성 보장도 문제입니다.


그리고 현재의 존재에서 다음의 존재로 넘어가는 주체가 없다면 현재의 존재가 지은 업에 대하여 과보를 받아야 할 주체도 없으니 인과응보의 법칙이 적용될 수가 없습니다.

 

다섯째, 지금의 불교계에서도 모든 동물이 윤회 대상에 포함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동물 중에서도 곤충류에는 전혀 영체가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윤회의 대상에서 제외되며, 그 외 포유류를 제외한 동물에는 일부만 영체가 들어가므로 영체가 들어가지 않는 동물은 윤회에서 제외된다는 사실을 알려 드립니다.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 2권

펴낸곳/현지사-영산불교사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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