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13일 토요일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Ⅱ≫ 22장 부처님의 정법을 따르면 해탈 열반에 이르리

 22장

부처님의 정법을 따르면

해탈 열반에 이르리

 

부처님의 위신력은

측량할 수 없으리만큼 위대합니다.

부처님 회상, 부처님 교단 정법도량에서

들려드리는 말씀입니다.

정법을 따르면 해탈·열반에 이르며

삿된 길에 빠져 산다면

삼악도의 고통이 기다립니다.

부디 부처님께 귀의·귀명해주시면 합니다.

 

 

16세기 폴란드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가 연구 발표한 지동설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한다는 태양중심설은 수다한 우여곡절 끝에 그의 사후 50~100년 만에 빛을 보게 됩니다.

서구라파 제국을 손아귀에 거머쥔 중세 기독교의 절대 권력은 그들이 절대 진리로 신봉했던 천동설을 부정하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지지한 천문학자 부루노를 종교재판을 통해 화형에 처했습니다.

기독교가 신성시하고 있던 우주관을 근본적으로 뒤엎는 설이 바로 지동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과학상의 위대한 발견이었습니다. 결국 케플러와 갈릴레이 같은 천문학계의 거성들에 의해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진리로서 재확인됩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_종교상의 혁명적 발견

 

2005년도에 ≪21세기 붓다의 메시지≫가 나오자 불자들의 반향은 가히 폭발적이었습니다. 우리 현지사에서도 이 책자를 직접 판매하고, OO불교서점에서도 시판하였던 바 시판한 달부터 불교서점 판매집계 베스트셀러 순위 1위로 6개월간 계속 이어져갔습니다.

불교TV에서는 1년간 릴레이 설법을 요청해왔고 이를 수락하여 TV 법문을 하게 됐습니다. 내가 불교TV 무상사에서 법문을 하는 날에는 전국 불자들이 상경하여 초만원을 이루었고, 시청률 역시 크게 신장되었다고 TV측은 기뻐했습니다.

이렇게 6개월을 법문하는 중에 예측했던 대로 OO종단 측의 훼방 압력이 인터넷을 비롯해서 조직적으로 자행되고 있었습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이단 서적이라는 것입니다. 서점에도 금서이니 판매하지 말라는 압력을 가했습니다.

결국 종단과 간화선 행자들의 거대한 압력에 불교TV 측은 굴복하고 나의 정법의 감로 법문을 도중에 중단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화두공안를 들지 않으면 외도로 매도하는, 그런 배타성이 강한 종단인 것입니다. 그들의 눈엔 염불, 계율은 이단이요 외도인 것입니다.

 

나는 지금 인류 역사 이래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보다 더한 종교상의 혁명적 발견을 세상에 발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개론서이며, 지금의 ≪21세기 붓다의 메시지Ⅱ≫에서는 좀 더 깊이 다루고 있습니다. 부디 정독하셔서 진실한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귀의해주기 바라는 마음입니다.

 

우물 안 개구리 井底之蛙

 

붓다의 경지에 오른 분은 마치 높은 산의 정상에 우뚝 선 것과 같습니다. 산 정상에 오른 이는 그 밑 중턱과 아래 모두를 보고 압니다. 그러나 산 중턱까지만 오른 이들은 그 위쪽과 산정山頂을 모릅니다. 상품보살도 무아 속 절대계에 계시는 깊은 적멸의 부처님들의 빛 세계를 알지 못합니다.

하물며 외도의 신들이, 설사 하늘 신神 가운데 왕이라 할 수 있는 그들의 수장首長들이라 해도 부처님에 대한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습니다. 절대 알 수 없습니다.

 

영성에 관한 책들 중에 히말라야 깊은 산에서 몇 백 년을 수행하고 있는 이들이 예수를 만나고 붓다부처님를 만나 뵙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는 여기서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절대계에 계시는 부처님은 원만보신 노사나불이십니다. 그 분은 항상 108쪽 빨강 가사에 황금색 장삼, 말끔히 머리 깎으시고 8고리 석장을 드십니다.

부처님의 변화신경험세계에 나투시는 몸 역시 그러하십니다. 삼계의 왕이시기에 항상 위엄을 갖추십니다. 화신불 역시 그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그 책자에 나오는 붓다는 천마의 변화신일 뿐인 것입니다. 나의 이 말씀은 진실임을 강조합니다. 천마의 변화신을 붓다인 줄 알고 거룩하신 우리 부처님을 낮추어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우리 중생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하십니다.

 

1975년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종교지도자대회에서 힌두교의 성인이 기조 연설한 내용 중의 일부입니다

“A라는 개구리는 어떤 우물 속에서 태어나 쭉 거기서만 살고 있었답니다. 어느 날 바다에서만 살던 B라는 다른 개구리가 육지에 기어 올라왔다가 그 우물에 빠졌습니다.

A: 너는 어디에서 왔니?

B: 바다에서.

A: 바다는 얼마나 크냐? 이 우물과 같으냐?

B: 바다를 이런 좁은 우물과 비교한단 말이냐?

A: 이 우물보다 더 큰 세상은 있을 수 없다. 이 거짓말쟁이야. 어서 썩 나가지 못해!“

 

우리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 나름대로의 우물 속에서 살고 있으면서 그 우물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종교인은 종교인대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며, 무종교인은 무종교인대로 그러합니다. 기독교는 기독교대로 자신의 우물에 빠져있으며, 선불교는 선불교대로 자신만의 우물에 빠져있습니다. 과학은 과학대로 그러합니다.

몇 사람의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들이 코끼리를 만져보고 평을 합니다. 코끼리 다리를 만져본 맹인은 기둥 같다 합니다. 코를 만져본 이는 밧줄 같다 하고, 귀를 만져본 사람은 큰 부채 혹은 키곡식 따위를 까부르는 도구 같다 하고, 배를 만진 이는 벽과 같다고 우깁니다. 부분만을 접촉하고, 그 전체를 파악할 수 없는 것인데 그들은 각자 자기들의 견해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여러 종교들 역시 다른 종교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부분만을 알고 자기들이 제일이요, 남의 종교는 모두 이단이요 사탄이라 합니다.

 

장자莊子 추수편秋水篇에 우물 안 개구리를 찾은 동해거북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개구리가 자신을 찾은 동해바다의 거북을 만나 말합니다. “나의 우물 안 생활은 너무도 즐겁다네. 나는 우물 난간에 폴짝거리며 노닐다가 피곤하면 깨진 우물 벽에 들어가 쉬고, 물속에서는 겨드랑이께로 헤엄치다 피곤하면 턱을 물 위에 내놓고 쉰다네. 우물을 독차지한 즐거움이란 더할 나위 없는 것. 자네도 이리 와서 한 번 둘러보게나.”

그 권유에 따라 동해의 거북이가 우물 속으로 왼쪽 발을 내려놓았지만, 채 내려오기도 전에 오른쪽 무릎이 걸려버렸다. 발을 빼낸 거북이는 미안해하며 바다에 대해 이렇게 들려줍니다.

“바다는 천 리로도 그 넓이를 재지 못하고, 천 길로도 그 깊이를 가늠하지 못한다네. 9년 동안 홍수가 쏟아졌지만 물이 불어나지 않았고, 7년 동안의 가뭄에도 물이 줄어들지 않았지. 시간이 흘러도 그만, 물이 들어오고 나가도 그만이라. 이것이 바다의 큰 즐거움이라네.”

이 말을 듣고 우물 안 개구리는 깜짝 놀라 얼이 빠져버렸습니다.

 

정법을 따르면 해탈열반에 이른다

 

이 책을 정독하시는 사랑하는 불자 여러분!

붓다를 이루지 못한 이들은 진정한 정법을 모릅니다. 불과를 이루지 못하면 무엇이 정법인지 결코 알지 못합니다. 붓다의 눈불안이 열려야 정법을 연설演說할 수 있습니다.

존재의 근원, 도, 법을 깨닫는 수준으로는 이제 만물의 시始와 종終의 자리마음자리를 면대面對하는 수준입니다. 유위법현상계뿐만 아니라 무위법절대계까지 그 근원은 부처님 자리입니다. 따라서 아라한이나 보살도 부처님의 경지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아라한 이상의 성자를 죽이거나 불상의 목을 치는 업은 무간지옥에 떨어지고 어쩌다 사람으로 나온다 해도 문둥병을 얻고 다시 죽으면 무간지옥행합니다.

붓다 회상을 만나 부처님께 선근 공덕을 짓지 않으면 그 지중한 업보를 다 씻을 수 없다는 이 우주의 법을 과연 누가 안단 말입니까? 부처님을 능멸·모독하고, 연기법을 폄훼·능멸하는 대망어업은 정법을 뿌리채 살해하는 중죄업입니다. 극무간지옥으로 갑니다.

지옥은 분명 있고, 사람들은 지은 업에 따라 육도에 윤회합니다. 공을 체험하고 음계·중계를 선지하면서 두타행으로 아라한 되고, 이타행하면서 염불 공부로써 보살되는 이 가르침은 부처님 말씀입니다.

부처님 말씀은 곧 정법입니다. 불과를 이루시어 절대계에 법신과 원만보신을 둔 붓다, 부처님을 상대로 험담하고 능멸하는 업은 길이 씻을 수 없습니다. 불효·오역의 죄보다 더 무겁습니다.

 

법의 정상에 오른 붓다의 말씀, 곧 정법의 법설을 경청하길 바랍니다. 부처님은 가장 힘이 있고 그 상호는 32상으로 원만 단엄하시고, 보살이 따를 수 없는 8만 4천의 신통 묘용이 있으십니다. 빛으로 이루어져 있으시기에, 빛 자체가 되셨기에 영원히 멸도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백천삼매, 대적정삼매 속에 항상 계십니다.

 

이 세상에서도 실력 있고 잘 생기고 건강하고 마음 씀씀이가 원만한 사람은 지도자의 자리에 오릅니다. 저 영계에서도 보다 청정하고, 기품이 있고 상호 원만하고, 신력神力이 있으면 높은 하늘의 벼슬자리에 앉습니다.

 

아라한이 되고 보살이 되고 상품보살로 오를수록 그만큼 청정하고, 청정하다 못해 몸에서 빛光輝이 납니다. 상품보살에서 붓다 될 때까지 씻어 내리는 오물먹물같은 업장이 열 드럼도 더 될 것입니다.

보살과 붓다는 1급수보살와 순도100%의 증류수붓다 차이와도 같습니다. 깨끗하고 청정한 광명의 차이도 그러합니다.

지옥으로 내려갈수록 영혼체의 색깔은 숯검정처럼 거무튀튀합니다. 성자의 하늘 위로 올라갈수록 몸에서 나는 신광身光은 그 광휘가 아름답고 찬연합니다. 음성도 미묘음이 됩니다.

보살에서 붓다로 올라갈수록 지혜와 자비도 완벽해져갑니다. 몸에서 방광하는 빛은 안팎이 없어야 하고 영롱해야 합니다. 붓다의 빛은 백종오색광명, 억종광이 됩니다. 외도의 수장과 정토보살의 몸에서 나는 빛의 차이만해도 일반 가로등 빛과 수은등 빛 차이라고 하겠습니다.

부처님에겐 큰 힘이 있다 했습니다. 불과를 이룬 모든 붓다의 보신佛에게도 큰 힘이 있습니다. 공·천天·I AM스스로 있는 자존자의 주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주적인 힘과 능력을 발휘합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 불 세존은 특히 무한한 힘이 있습니다. 모든 외도들을 순간에 제압할 수 있는 대화광삼매의 불수천억 도에 이르는을 임의 자재로 쓰십니다. 상상할 수 없는 신력인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하고 희유하신 부처님께 선근 공덕을 짓는다면 부처님께선 우리의 무주고혼 보報, 지옥·축생·아귀보를 끊어주기도 하십니다. 업장 소멸은 부처님만이 해주실 수 있습니다.

 

중생이 죄업을 지으면 그 사람의 영혼체에 반영이 됩니다. 유식에서는 우리가 지은 모든 선악의 업들은 고스란히 우리 각자의 아뢰야식제8식_藏識에 저장된다 합니다.

어떤 사람은 손발이 수갑이나 족쇄로 채여 있기도 하고 몸뚱이 전체가 쇠사슬로 코일같이 옥죄어 있기도 하고 압박 붕대로 감겨 있기도 하고 심장에 못이 박혀 있기도 합니다.

인연이 되어서 이런 것이 드러나면 그 사람은 곧 뇌졸중으로 쓰러지거나 전신마비의 식물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지은 업은 정업불면定業不免이어서 스스로 백 천 생을 수행하고 태산만한 복덕유루복을 짓는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타력이 아니면 이런 업장 소멸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자력수행으로는 백 생, 천 생을 살아도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탐진의 뿌리를 녹이는 문제, 하늘 마, 원결 마, 용신마를 떼는 문제도 자력으론 어렵습니다.

다겁생에 쌓은 악습이나 악의 기 역시 자력으로는 제멸하기 어렵습니다. 부처님만이 이 모두를 해낼 수 있으십니다.

부처님의 위신력은 측량할 수 없으리만큼 위대합니다. 부처님 회상, 부처님 교단 정법도량에서 들려드리는 말씀입니다.

정법을 따르면 해탈·열반에 이르며, 삿된 길에 빠져 산다면 삼악도의 고통이 기다립니다. 부디 부처님께 귀의·귀명해 주시면 합니다.

 

 

출처 :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Ⅱ≫
현지궁 현지사 광명 만덕, 자재 만현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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